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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_ 정동에 독립맥주공장을 세우다

정동은 알면 알수록 먹먹한 동네입니다. 정동(貞洞)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어 정동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정릉은 1409년 지금의 정릉동(貞陵洞)으로 이전되었고 이후 정동이라는 이름만 남았습니다.

조용했던 정동은 1876년 조선의 개항 이후 소란해집니다.

출처 : pinterest.com

1735년 서양에서 제작된 세계지도 속의 조선.

1882년 미국과 수교하고 인천항이 열리면서 정동도 개방되었습니다. 미국공사관 부지로 정동 땅이 제공된 것입니다. 이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벨기에 공사관이 차례로 자리잡았습니다. 정동에 작은 지구촌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외교공관뿐만 아니라 지금도 존재하는 성공회성당, 정동교회, 구세군중앙회관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듯이 러시아정교회와 가톨릭수녀원 등의 종교시설도 설립되었습니다.

출처 : museumnews.kr

미국 북감리교회의 스크랜톤 선교사가 1886년 5월 31일 이화학당을 설립한다. 고종황제는 1887년 이화(梨花)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미션스쿨인 이화학당과 배재학당, 그리고 이화학당에 설치된 여성 전용병원인 보구여관. 외교와 선교, 교육과 의료 등 정동은 한국 근대의 꿈을 압축한 공간이었습니다. 정동은 1897년 대한제국의 출범과 더불어 근대사의 중심이 됐습니다. 새로운 조선에 대한 상상은 모두 덕수궁이 있는 정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출처 : isplus.live.joins.com

대한제국 황실의 문양인 자두꽃 금박 문양이 선명한 고종황제와 엄비의 사진.

고종은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제1대 황제(재위 1863∼1907)입니다. 고종은 새롭고 강력한 독립국을 희망했습니다. 1897년 10월12일 고종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자주국가임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했으나 불과 8년 만인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깁니다. 그리고 일제는 1910년 마침내 한일병합조약으로 국권을 침탈합니다.

출처 : cha.go.kr

아관망명(1896.02.11-1897.02.20)으로 고종과 순종이 1년간 망명해 지내던 러시아공사관. 지금은 첨탑만 남아 있다.

1894년 갑오왜란으로 경복궁에 유폐되어 있던 고종이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의 ‘망명’을 통해 왕권을 회복하고, 덕수궁을 새 정궁으로 삼아 일본군의 재침략을 막고자 일종의 ‘국내 망명정부’로 세운 체제가 대한제국입니다. 대한제국은 조선의 새로운 꿈이었습니다. 3만 명의 신식군대를 육성하고 1898년 대한제국황실무관학교를 창설한 것은 새로운 조선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출처 : kjclub.com

신식 무기인 ‘암스트롱 포’ 도입한 대한제국황실무관학교.

대한제국황실무관학교의 당시 정원은 200명이었는데 무려 1,700여 명이 지원하여 지금의 사관학교를 능가하는 치열한 경쟁을 보였습니다. 교육기간은 1년으로 원수부의 특별시험을 통과한 이들에게만 졸업자격증이 수여되었고 졸업생들은 종6품 참위(소위)로 임명되었습니다. 무관학교는 1896년부터 1909년까지 49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러나 꿈은 계속되었습니다. 이회영 선생이 만주에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교육내용을 그대로 따랐고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인 이세영, 이관직, 이장녕, 김창환 등 상당수가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이었습니다. 또한 항일 무장 독립운동을 벌인 지청전, 유동렬, 이동휘, 신규식, 민긍호, 김혁 등이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들이었습니다. 청산리 대첩의 김좌진 장군 역시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입니다.

출처 : namu.wiki

1940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한국광복군 창설 당시 광복군사령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고종의 꿈은 대한제국황실무관학교에서 시작해서 신흥무관학교 그리고 광복군으로 연결되어 있다.

고종은 독립을 원했으며 조선의 근대화를 희망했습니다. 백성 또한 그런 고종의 의중을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일제는 고종을 강제 폐위시켰지만 백성들 마음속에서 고종의 위상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궁궐에 유폐된 상황에서도 계속 밀명을 내리며 독립전쟁을 지휘하던 고종은 1918년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으로 조성된 새로운 국제정세를 활용할 계획을 세웁니다.

 

고종은 미국이 일제의 ‘한국병탄’을 도움으로써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제1조 ‘거중조정 의무’를 위배한 것에 대해 윌슨 대통령에게 사과를 받고 국권회복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려고 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고종 자신의 북경 망명을 추진합니다. 이를 막으려는 일제의 야만적 대처가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독시(毒弑)입니다. 고종은 북경에 행궁을 마련하게 하고 궁을 빠져나가는 방도를 찾던 중 끝내 독살되고 말았습니다. 향년 67세였습니다.

출처 : ko.wikipedia.org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죽음은 2·8 대한광복선언, 3·1 대한광복운동, 상해정부 수립 등 다양한 독립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고종 독시’는 대한제국이 부활하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3·1운동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자 기폭제가 고종 독시였습니다. 3·1운동은 ‘조선’을 복고하려는 ‘조선독립만세’ 운동이 아니라, 일제에 유린된 고종의 ‘대한제국’을 광복하려는 ‘대한독립만세’ 운동이었고, 4개월이나 지속한 이 거국적 만세 운동의 열기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 koreaexpose.com

고종황제의 비참한 독시 9개월 후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역사학자 황태연은 저서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에서 다음과 같이 고종의 꿈을 말합니다. “고종황제 부처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명성황후가 처절하게 죽음으로써 그에 대한 백성들의 공분이 대한제국을 일으켰듯이, 고종황제의 비참한 독시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일으킨 것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상해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의 국호 ‘대한’을 계승했고, 그 헌법에 ‘구황실우대’ 조항을 설치했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독립정신에 부응하고 광복전쟁 과정에서 그 정신을 이어가려고 했던 것이다. 3·1운동으로 창건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당시 제국주의 시대에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임시정부였다.”

정동 캐나다 대사관 앞 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회화나무.

정동에서 대한제국의 꿈과 동시대 대한민국의 꿈을 연결해 봅니다. 1876년 개항 이후 만들어진 정동 지구촌 이야기. 1897년 고종에 의해 세워진 대한제국과 그 중심인 덕수궁 이야기.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위되었던 고종의 분통한 이야기. 고종의 희망과 꿈은 1919년 1월 21일 독시로 영원히 좌절됩니다. 그러나 고종이 만들어 낸 여러 가지 이야기들의 사이사이에는 언제나 특정한 희망과 꿈이 있었습니다. 국어사전에서는 그 희망과 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독립(獨立)

1. 다른 것에 예속하거나 의존하지 아니하는 상태로 됨. 2. 독자적으로 존재함.”